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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hotamazing 조회수:2526
2014-07-29 14:13:00

                             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 화백은 지난 2003년 7월 조선의 개국을 다룬 제1권 '개국' 편을 펴낸 지10년 만인 2013년 마지막 제20권 '망국' 편을 내놨다.

이 시리즈는 유네스코가 선정한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조선의 정사(正史)를 충실히 담아내면서재미도 놓치지 않아 폭넓은 인기를 끌어왔다.

특히 이 시리즈는 만화를 넘어 역사에 무게중심을 둔 덕분에 조선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출간 이후 '역사평설 병자호란' '조선의 명탐정들'같은 조선사 관련 책이 나왔고, 이미 출간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조선의 9급 관원들' 등도 독자들이 다시 찾고 있다.

40~50대 중심이었던 역사책 독자의 연령층을 30~40대로 낮췄고 여성, 청소년으로 독자층을 확대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아울러 만화의 원작인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도 크게 높아졌다.

종영을 한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매회 3만건 이상의 다운로드 수를 기록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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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총 1,893권 88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49,646,667자의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작성되었다. 왕의 실록은 반드시 해당 왕의 사후에 작성되었으며, 임금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사관들은 독립성과 비밀성을 부여 받아 사소한 사항까지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작성할 수 있었다.

또 《조선실록》에는 “사신(史臣)은 논한다. …”라는 형식으로 사관의 의견(일종의 논평)을 적을 수 있었다. 실록은 편찬될 때마다 여러 부를 활자로 더 인쇄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분란에도 그 기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과 순종에 대한 실록은 국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의해 편찬되지 못하고 있다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종태황제실록》과 《순종효황제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규례(사관이 작성한 사초를 바탕으로 집필해야 한다 등)에도 맞지 않고, 일본 제국의 관점에 입각한 바가 크다고 판단하여 포함시키지 않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래서 이 견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철종(哲宗) 때까지의 실록을 의미하고 있다.


조선 전기
조선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하여 동년 4월 22일(음력 3월 22일)에 완성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 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정종·태종의 3대 실록을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 2부는 고려 시대로부터 실록을 보관하던 충주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 27)에 다시 2부씩 더 등초하여 전주·성주에 사고(史庫)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으며, 이후 역대의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출판하여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4사고에 각 1부씩 보관하였다. 다만 태조·정종·태종의 3대 실록은 활자화하지 못하고 처음에 등초한 그대로 보관하였다.

임진왜란과 실록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에 왜구에 의해 춘추관·충주·성주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정부는 난중인데도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 혹은 해주·강화도·묘향산 등지로 나누어 보관했다가, 평란 후 국가 재정이 곤란하고 물자가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실록 재출판 사업을 일으켜,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선조 39) 3월까지 2년 9개월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을 출판하였다.
이때 출판한 부수는 3부였으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과 교정본을 합하여 5부의 실록이 되었으므로 1부는 국가의 참고를 위하여 옛날과 같이 서울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병화를 면할 수 있는 심산유곡과 도서를 택하여 강화도 마니산·경상북도 봉화군 태백산·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하고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신간본, 마니산에는 전주실록,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 《선조실록》을 편찬 출판한 후 또한 다섯 사고에 각 1부씩 보관했다.

조선 후기
그 후 춘추관에 보관했던 실록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또 다시 소실되어 완전히 없어지고, 묘향산 실록은 1633년(인조 11)에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산으로 이전하고, 마니산 실록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크게 파손되어 낙질(落帙) 낙장된 것이 많이 생겼다.
그 후 현종 때에 마니산 실록은 보수되었으나 춘추관 실록은 영원히 복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니산 실록은 1660년에 같은 강화도 내의 정족산성 안에 사고를 신설하고 1678년에 정족산 사고로 이전하였다.
인조 이후 실록은 정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으며, 이후로 역대의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출판하여 4사고에 추가 보존케 하였는데 전례에 따라서 정족산·태백산·적상산 사고에는 정인본, 오대산 사고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4사고의 실록은 일제 침략 당시까지 완전히 보전되었다.

일제 강점기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탈한 후 정족산 및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전의 종친부 자리에 설치한 소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기고,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이왕직(장서각에 옮겼으며,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도쿄 제국대학에 가져다 두었는데 오대산본은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에 788책 중 714책이 불타버렸고 일부 외부로 대출되었던 책들만 보존되어 오대산본 중 27책을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에 반환 되었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30년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

해방 이후
이리하여 광복 당시까지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남아 있고, 이왕직(李王職 : 지금 구왕궁)에 있는 적상산본은 광복 후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탈취해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재 온전히 남아 있는 실록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정도이다.
한편, 2006년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된 오대산본 이 도쿄 대학으로부터 대한민국에 기증 형식으로 47책 이 전달 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장처를 임시로 서울대 규장각으로 결정하여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소장처가 결정되기도 전에 규장각 소유라는 도장을 찍어 해당 도서를 훼손시켰다.

실록의 편찬과정
태조가 승하한 1409년 (태종 9년)에 태종은 하륜에게 명을 내려 전조의 예에 의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사관 송포 등은 당대의 사람이 실록을 편찬하면 올바른 역사를 편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그 의견을 묵살하고 하륜으로 하여금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다음 정종과 태종이 승하한 뒤 세종 5년에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을 편찬하려고 하였다. 이 때에도 두어 대 지난 뒤에 편찬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세종은 이것을 묵살하고 이듬해 3월부터 변계량으로 하여금 이를 편찬하게 하여 1426년 (세종 8)과 1431년 (세종 13)에 각각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을 완성하였다. 이후 역대 임금의 실록은 그 임금이 사망한 뒤 곧 편찬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실록의 편찬을 위해 임시로 실록청 또는 찬수청을 설치하고 영의정 또는 좌.우의정 가운데 한 사람을 총재관에 임명하여 총지휘하게 하고, 대제학과 기타 글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당상과 낭청에 임명하고, 도청과 일방,이방, 삼방 등 각방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다.

실록을 편찬하는 자료에 관해서는,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의 한 기술 가운데는 사초, 시정기, 승정원일기, 경연일기, 각사등록 등 상고할 수 있는 문서라면 모두 주워 모아 연대순으로 나누고 순서의 구별을 하여 편집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실록의 편찬에는 정부의 모든 기관에서 기록한 문서류는 물론, 그밖에 개인의 문서까지도 참고가 되어 작성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정기가 이미 임금의 동정과 경연강론을 위시하여 승정원일기, 각사계사 중의 중요한 것, 소장이나 제수의 표표한 자, 등과인원, 각사의 계하문서 등에 관한 자료를 참고하여 수찬된 것이기 때문에 기본 자료가 되었다. 중종 29년 6월에 실록에 대하여 “대저 시정기를 근본으로 실록을 마련하여 만세에 전한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수집된 개인소장 사초는 전문 그대로 실록편찬시에 부입되었다.

이와 같이 시정기와 사초 등 모든 자료를 수집한 다음 각 방의 당상과 낭청이 날마다 실록청에 나와서 연월일 순의 편년체로 실록의 1차 원고인 초초를 작성하여 도청에 넘긴다. 이것으로써 각 방의 임무는 끝난다. 다음으로 도청에서 낭청이 먼저 초초를 교열하여 잘못된 것은 정정하고 빠진 것은 추가하고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여 2차 원고인 중초를 작성한다. 그러면 실록 편찬의 최고 책임자인 총재관과 도청당상이 중초를 교열하여 문장과 체제를 통일함과 동시에 또한 많은 필삭을 가하여 정초를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실록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초초와 중초, 정초의 세 단계를 거쳐서 완성되면 곧 인쇄하여 사고에 봉안하고, 실록의 기본 자료였던 춘추관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 및 실록의 초초와 중초, 정초 등은 모두 세초하였다. 이는 기밀의 누설을 방지함과 동시에 종이를 재생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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